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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천안=정다워기자] 4강 신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공식 응원단 ‘붉은악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조직적 축구 응원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다. 2002 한일월드컵을 출발점으로 삼아 붉은악마가 중심이 되어 하나 된 응원을 펼쳤고, 그야말로 홈 어드밴지티를 십분 누릴 수 있게 됐다. 당시 대학생으로 붉은악마의 중심에 섰던, 지금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중년이 된 김정연 전 지부지원팀장은 “내 생애 가장 뜨거운 여름”이라며 당시를 추억했다.
◇천안일화를 응원했던 대학생김 전 팀장은 원래 프로축구 천안일화의 팬이었다. 1998년 팬이 됐는데 불과 2년 만에 팀이 성남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응원하는 팀을 잃어버렸다. 김 팀장은 “상실감이 굉장히 컸다. 축구를 좋아해 팀에 마음을 줬는데 하루 아침에 팀이 사라지니 허탈하더다. 많이 슬펐고 울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라고 회상했다. 다행히 마음을 줄 또 다른 창구가 있었다. 바로 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였다. 김 팀장은 “천안일화를 서포터로 활동하며 자연스럽게 붉은악마와 연결이 됐다. 당시 붉은악마 회원은 대부분이 K리그 팬이었다. 저도 어렵지 않게 어울리게 됐다”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붉은악마 근본은 K리그였다당시 붉은악마는 프로축구 수도권 팀 서포터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수원 삼성, 부천SK, 안양LG 등이 대표적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응원가 ‘오 필승 코리아’는 부천 서포터 헤르메스 대표 응원가였다. 유럽 축구단 서포터가 부르던 노래를 헤르메스가 도입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구호는 수원 삼성 응원구호였다. 김 팀장은 “아무래도 K리그 서포터들이 조직의 중심에 있어 응원가, 응원구호도 많이 갖다 썼다. 부천, 수원뿐 아니라 전북이나 안양 구호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약 K리그, K리그 서포터가 없었다면 당시의 붉은악마는 없었을 것이다. 붉은악마의 근본도, 2002 4강 신화의 원동력도 K리그였다고 생각한다. K리그 팬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의 응원가, 구호의 파급력을 고려하면 과장이 아니다. 그걸 알거나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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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카드섹션, 마지막 장식도 K리그
붉은악마가 주도한 응원가, 구호도 당시 큰 화제였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센세이션을 일으킨 요소는 카드섹션이었다. 첫 경기 폴란드전을 시작으로 매 경기 화려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대표팀에 기를 불어넣었다. 김 팀장은 “천안에 한솔제지가 있었는데 그 회사 도움을 받아 코팅까지 해 1만5000장에서 2만장의 종이를 경기장으로 공수했다. 경기장 도면을 보고 종이 색깔을 맞춰 깔았는데 경기를 거듭할수록 능숙해지더라”라며 웃었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카드섹션 내용을 궁금해 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방송, 신문사에서도 촉각을 기울을 정도였다. 김 팀장은 “당시 회원 2명이 담당이었다. 4강전을 앞둔 당일 새벽 라디오에서 구호가 정해졌다고 뉴스가 나오더라. 그런데 정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만큼 큰 관심을 끌었다. 마침 제가 언론담당이라 기자들에게 전화를 너무 많이 받았다.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라며 라며 웃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남긴 카드섹션은 ‘꿈★은 이루어진다’였지만 김 팀장의 마음에 깊이 남은 메시지는 3~4위전 ‘LOVE CU@K리그’다. 김 팀장은 “우리는 프로축구가 근본이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삼던 사람들이었다. 붉은악마 회원은 2002 월드컵을 통해 K리그가 부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월드컵은 4년에 한 번 하지만 K리그는 매해, 매주 경기를 한다. 대표팀 축구만큼 사랑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다”라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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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붉은악마는 국호를 바꿨다
20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이라는 표현이 가장 보편적인 국호로 사용됐다. 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어색한 단어로 취급됐다. 그런데 붉은악마의 응원구호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한국보다 대한민국을 국호로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21세기에는 오히려 한국이라는 표현이 자취를 감췄다. 붉은악마의 파급력이 그 정도였다. 김 팀장은 “우리끼리도 정말 놀란 부분이었다. 응원구호가 국호를 바꿀 줄 누가 알았겠나. 그 정도로 우리가 큰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뿌듯함을 느낀다. 우리가 대단한 권력을 갖기 위해 일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한 것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오죽하면 붉은악마가 CF광고까지 나왔겠나”라고 말했다.
◇내 생애 가장 뜨거운 여름붉은악마에게는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당시 회원들 대다수가 대학생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월드컵 기간에 1학기 기말고사가 있었다. 김 팀장은 “다들 공부는 거의 포기하고 월드컵에 집중했다. 저도 시험을 보긴 했지만 공부는 아예 안 했다. 그래서 D를 맞은 과목도 있다. 지금도 성적표를 보면 남아 있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런 여름을 또 보낼 수 있을까”라고 회상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남는다. 당시 붉은악마의 바람과 달리 프로축구는 여전히 정체되어 있고, 월드컵을 보는 국민의 눈은 높아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축구 시스템이야 발전했겠지만 붉은악마가 꿈꿨던 그림은 아닌 것 같다. 20년이 지났는데 우리 축구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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