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근래 보기 드문 스타일리시한 영화가 나왔다. 60대 여성 킬러 조각(이혜영 분)이라는 신선한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새로운 여성 서사를 썼다는 찬사를 받은 소설 ‘파과’가 스크린으로 옮겨오면서 섹시한 미장센을 덧입혔다.

조각은 여성과 노인이라는 중첩된 약자의 지위에 놓인 인물이다. 동시에 상대를 실력으로 죽여야 하는 킬러다. 이혜영은 이런 형용 모순적 캐릭터를 고혹적인 분위기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그려냈다. 매력적인 음성과 또박또박 찍어 박는 발성 역시 일품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허스토리’(2018)에서 여성 서사를 섬세하게 그려낸 민규동 감독의 연출력이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작품에선 ‘방역’이 핵심 키워드다. 세상 갖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바퀴벌레로 지칭하고, 이를 죽이기 때문에 방역이라 명명한다. 조각이 킬러가 되는 과정을 그려내는 전사(全史)도 매혹적이다. 아역 시절을 연기한 신시아는 최근 방영 중인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과는 다른 격한 액션으로 쾌감을 선사한다. 주한미군에게 당할 뻔한 성폭행을 물리칠 때나 묵직한 체구의 조직 두목을 제거할 때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경쾌한 액션은 이혜영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연결하는 데 무리가 없다.

소설은 묘사가 꽤 현란한 작품이다. 그 때문에 영화는 이미지로 보이는 것에 무척 신경 썼다. 조각의 유년기(1963~65년)나 투우(김성철 분)와 맞닥뜨리는 장소인 신성방역의 장소를 건조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그려내 웨스턴 무비의 질감을 만들어냈다. 조각을 짙은 갈색이 감도는 퍼스널 컬러를 입히면서 킬러가 가진 압도적 아우라를 표현했다.

‘파과’(破瓜)의 중의적 단어가 주는 재미도 있다. 오이 과(瓜)자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가 두 개 나온다. 이는 이팔청춘인 16세를 뜻한다. 파과지년(破瓜之年)에서 나온 어휘다. 이는 조각이 킬러로 입문하는 나이다. 노년에 이르러 쇠잔해지면서 냉장고에 놓인 썩은 과일, 즉 파과(破果)를 보는 장면은 작품을 아우르는 핵심적 메타포다. 썩었지만 여전히 맛이 있는 과일은 조각을 뜻하기 때문이다.

김성철의 연기는 시간차 공격을 보는 맛이 있다. 겁을 잔뜩 먹은 채로 벌벌 떨던 투우가 갑자기 돌변해 킬러 본색을 드러내는 장면은 무척 오락적이다. 동시에 김성철의 연기 진폭이 크다는 것도 증명한다. 작품 중반부터 조각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이어가는데, 소년미 가득한 얼굴에서 뿜어내는 살기가 팽팽하게 이어져 보는 맛을 더한다.

다만 122분이라는 러닝 타임이 제법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조각을 죽음에서 구한 수의사 강선생(연우진 분)을 비롯해 여러 방향으로 보내놓은 떡밥을 회수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한 탓이 크다. 초반부 생략과 압축으로 힘차게 달려 나가던 영화가 느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말에서 조각과 투우의 치명적 관계가 밝혀지면서, ‘파과’의 파괴적인 결말로 마무리 짓는다.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나, 전통 누아르를 기다린 관객에게는 충분히 어필할 만한 영화라는 건 분명하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