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代) 독자 450년만의 연년생(年年生) 기록 (1971년 2월 14일)
3남2녀 낳았으니 실력과시(實力誇示) 더 않기로
12대 4백50여년동안 내리 외아들로만 혈통을 이어온 가문이 있다. 사그라지려는 촛불처럼 아슬아슬 1점 혈육만 달랑 떨어 뜨렸지만 양자계승은 한번도 없었던게 자랑. 이 12대 독자가 드디어 조상들의 한을 풀어 금싸라기같은 3남2녀를 낳았다. 산아제한을 떠드는 세상에서 이건 오히려 기적처럼 기쁜일-. 그러고도 출산할 힘이 남아돌아 생각대로라면 1개소대쯤 퍼뜨려놓고 싶지만 생활문제를 참작, 묶어 놓았다니 이 아니 기쁘냐는 것. 아들낳는 날이 동네축제일이었다는 완주(完州)군 박(朴)씨댁 경사를 찾아가 보자.
아슬아슬한 외줄기 족보 성경 구절처럼 낳고 낳고
전북(全北) 완주군 조촌면 동상리 호남고속도로 전주(全州)「인터체인지」길가에 아담한 기와집 한채.
일가친척이라곤 처가밖에 없는 박상용(朴相龍·38)씨가
불면
꺼질듯 아슬아슬한 혈통을 이어 12대째 살고있는 곳이다.
『12대 선조인 희신(希信)공때부터 내리 독자로만 가문이 어어져 내려 왔읍니다. 그래서 저희집 족보는 마냥 한줄이에요. 신약성경「마태」복음 제1장에 「그리스도」의 족보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로 죽 나열돼 내려오지 않습니까? 』
박상용씨는 『우리가 꼭 그 짝』이라면서 외줄기 족보를 꿴다.
『희신은 민학(敏學)을 낳고, 민학은 취장(就章)을 낳고, 취장은 세의(世義)를 낳고, 세의는 창두(昌斗)를 낳고, 창두는 은엄(恩儼)을 낳고, 은엄은 행덕(行德)을 낳고, 행덕은 영순(榮淳)을 낳고, 영순은 장환(璋煥)을 낳고, 장환은 기원(基爰)을 낳고, 기원은 상호(相鎬)를 낳고, 상호는 상용(相龍)을 낳고, 상용은 순자(順子)하여 대만(大晩)·대헌(大憲)·대규(大奎)와 숙영(淑英)·선영(善英)을 낳았더라 』
딸이라도 있음 좋으련만 결혼땐 “밭좋으냐” 농담도
단숨에 족보를 왼 박씨는 한바탕 허리를 잡으며 폭소.
박씨의 본관은 밀양(密陽). 21선조 현(鉉)공이 고려중엽 문사헌과(文司憲科) 정3품 벼슬까지 지낸 명문이다. 현공 이후 박씨 가문은 시들시들, 11대째까지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다가 12대째 희신공때부터는 무슨 까닭인지 달랑 1점혈육으로 가문이 이어져 내려오게 됐다. 딸이라도 좀 그득하게 낳았으면 기르는 재미로라도 외로움을 덜 수 있으련만 무슨 조화인지 조물주께서는 꼭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는 인색이었다. 신희공이 이조초엽 응기(應基)공의 외아들로 태어난 이후 현재 상용씨까지 완벽한 「스트레이트·온리」.
그래서 박씨는 집안은 아들을 그득하게 낳아보는 것이 안타까운 비원이자 가문의 무슨 교조(敎條)처럼 돼버렸던 것.
희신공때부터 다시 12대인 상용씨가 결국은 이 한을 3남2녀로서 풀어버리게 된 것이다. 상용씨가 결혼한건 61년 봄. 전북 익산(益山)군 금마(金馬)면 동고도리 이순자(李順子·38)씨가 그 배필. 12대 독자라는 얘기에 꺼림칙 했지만 「비장한(?) 결의」로 시집가게 됐다고 눈웃음치며 이여인은 회상한다.
그의 결혼이 어찌나 화제가 됐던지 부락사람들은 『밭이 좋아야지…』『씨는 잘 뿌리겠나?』등으로 화제가 비등.
기독교 신자인 박씨는 동상교회 목사의 주례로 화촉을 밝혔다.
결혼한 몇달뒤 태기가 있었고 이듬해 이여인은 덜컥 장남 대만군(9)을 출산했다.
상용씨의 기쁨은 말할것도 없고 동네 사람들이 껑충껑충 뛰며「득남잔치」를 열어 줄 정도로 「동네잔치」가 됐다.
이듬해 연년생으로 대헌군(8)을 출산했다. 기록을 깨뜨렸다고 다시 부락에서는 온통 떠들썩했다. 또 이듬해 딸 숙영(7)을 낳았다. 말하자면 상용씨는 아내의 임신 주기를 최대한으로 활용한셈. 이듬해 3남 대규군(6)까지 출산하자 부인 이씨의 실력(?)은 더 할 나위없이 과시됐다. 3년전 선영(3)을 낳고선 「생활문제」를 참작, 본의아니게도 산아제한을 실시했다.
“친척없는 독자(獨子)의 슬픔 겪지 않곤 모르죠”
『독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독자의 슬픔을 알 수 없어요. 고등학교 재학중 부모님이 돌아 가셨을 때 덜렁 저 혼자 상복을 입고 대상을 치러야 했었죠. 누가 있겠어요? 지금이야 처가라도 있지만 그땐 사실 어린 저혼자 막막했죠. 다행히 독자「클럽」6명이 찾아와 동병상린으로 함께 울어주었기 망정이지…』
당시를 회고하며 눈시울 적시는 박씨.
54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 한때 법관이 되고자 고시준비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60년 군에 입대, 61년 의가사제대했다. 제대후 64년부터 교편생활을 시작, 김제(金堤)군용지면 비룡국민학교에 부임했다. 이 학교는 누구나 가기를 꺼려하는 곳. 음성나환자 집단정착지의 미감아학교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잘못된 선입관을 버리고 미감아교육에 전력을 다했다. 그래서 교육자로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 현재는 완주군 동양국민학교 신촌분교(3학급)로 전임, 가난한 교사의 박봉으로 금싸라기같은 자식들을 건사하기에 허리가 뻐근하다.
『제가 「크리스천」이지만 12대에 와서 아이들을 이렇게 많이 둘 수 있었던건 부모님들의 정성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읍니다』
까닭인즉 아버지 상호씨는 11대의 고독함을 풀기위해 할아버지 묘자리를 찾는 것만으로 재산을 기울여 버린것.
완주군 상관면에 3태혈(三胎穴)이라는 명당을 찾아 할아버지 기원공까지 모셨다.
아버지는 외아들만으로 작고했지만 무덤을 쓴 정성이 지금 나타나지 않았나하고 그는 믿는다. 뿐만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김제 미륵사(彌勒寺)에 가서 백일기도를 올렸고, 정성들여 불공을 하기도 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불공은 하지 않지만 어머니의 정성이 소원을 풀었다고 확신한다.
『작년 추석에는 5남매를 모두 데리고 증조부 장환공 산소부터 아버지 산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묘를 갔었읍니다. 감개무량하더군요.』
말하는 박씨의 얼굴에 자랑과 기쁨과 삶의 결의가 넘쳐 흐른다.
<서울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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