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못할 슬픈 역사 속 일깨움 “백성이여 일어나라”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내 한 몸 편히 누일 곳 없는 나라. 차가운 칼날에 베인 한 송이 꽃이 심장을 후벼파는 슬픔을 끼얹는다. 돌이킬 수 없는 비통한 역사는 영원히 고통으로 남는다. 하지만 마지막 그의 외침은 영원토록 우리 가슴에 숨 쉰다. “백성이여 일어나라!”
대한민국 뮤지컬의 초석을 다진 뮤지컬 ‘명성황후’가 올해 30주년 공연으로 돌아왔다. 조선 말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압력으로 인해 어지러운 세상, 시대의 흐름을 읽는 총명함과 선구안을 가진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역사는 바뀌지 않지만, 작품의 30년 세월은 변했다. 1996년 ‘고종’ 역 서영주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대원군’으로 무대에 오른다. 1997년 건반 연주자였던 김문정은 음악감독으로서 지휘봉을 잡았다. 2013년 조연출 윤홍선은 프로듀서가 됐다.
‘명성황후’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는 배우들의 얼굴에서도 조금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 시대의 ‘명성황후’ 역 김소현·신영숙과 함께 차지연이 새로 합류했다. ‘고종’ 역 강필석·손준호·김주택, ‘홍계훈’ 역 양준모·박민성·백형훈, ‘대원군’ 서영주·이정열, ‘미우라’ 역 김도형·문종원이 연기한다.


◇ 정석 놓치지 않은 숨은 저력…웅장한 ‘여백의 미’에 압도
‘명성황후’는 30년 역사의 K-뮤지컬의 저력을 보여주는 전통의 ‘맛’과 ‘멋’을 모두 갖췄다. 화려함으로만 치장한 겉모습으로 상대할 수 없는 한국예술만의 담백함과 전통미를 보여준다. 번잡함 없이 여백의 미를 배우들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 ‘우리의 것’을 발견한다.
무대와 의상은 세월에 닿아 해진 것만 교체했다. 다만, 30년간 공연을 이어오면서 얻은 조언에 따라 현대화에 발맞춰 개조하면서도 작품이 지닌 고전을 지켰다. 특히 장면 전환의 교과서인 경사진 원형 회전무대는 당시 왕권의 위상을 상징하는 동시에 이중 연출로 극도의 긴장감을 끌어낸다. 단조로운 패턴과 옷감의 색상에서도 옛것을 그대로 살린 한복의 정통을 잇는다.
피바람이 불기 전 은은한 기억들이 뇌리에 스친다. ‘고종’과 궁녀들의 술래잡기는 좋았던 때의 잔잔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소드 마스터 ‘홍계훈’과 군사들이 펼치는 정석의 칼군무는 용맹함을 보여준다. 연회장에서의 전통무용은 한국 고유미를 널리 전파한다. 무당굿의 생동감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사실을 극대화한 무당굿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듯하다.
성스루로 이어졌던 공연에 필요한 만큼의 대사를 가미했다. 여전한 건 진중함 속에 울려 퍼지는 웅장함이다. 대표 넘버들은 물론 미국·러시아·중국·일본의 특징을 살린 한 소절까지 디테일이 돋보인다. 무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대 뒤 숨은 합창으로 공연의 거대함을 더한다.
행복했던 그 시절을 향한 미소를 남긴 채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에 메아리친다. 칼에 베인 궁녀들의 육체는 한순간의 먼지처럼 스러진다. 고귀한 ‘명성황후’ 영혼의 넋을 기리며 시린 가슴을 매만진다.
마지막 ‘백성이여 일어나라’가 울려 퍼지는 순간, 모든 감정이 심장을 휘감는 감동으로 전해진다. 사람의 목소리로 감동의 파도를 일으키는 웅장함에 압도된다. 전율에 휩싸인 채 그들을 대신해 울부짖으며 우리의 정신을 일깨운다.
세월이 지나도, 시대가 바뀌어도 전 세계는 여전히 정치적 혼란 속에 많은 무고한 희생이 따르고 있다. 우리 주변에도 사회생활이라는 가면으로 위장한 핍박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 역사 속에서만 지난날을 한탄하기보다 지금 내 주변부터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명성황후’는 과거부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내 미래의 여정을 동행하며 항상 깨어있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