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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글·사진 스포츠서울 이우석기자]종로에서 뺨을 맞은 것처럼 서울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남녘 부산에 피난왔다. 피난 수도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과거 1000일이 넘는 동안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그 역할을 했던 부산. 지금은 전란이 아닌 일상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 수 있는 피난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대구를 지났을 땐 멀쩡했는데 부산에 접어들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제법 빗줄기도 굵다. 뭐 모자 하나로 피할 수 있는 가랑비가 아니었다. 회사에 지급한 카메라와 노트북으로 빗줄기를 가리고(물론 과장됐음을 고백한다) 점심을 먹기위해 식당으로 급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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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부터 ‘호랭이’나 ‘태즈매니아 데블’처럼 육식이라니. 동림갈비 좁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 삼겹살과 돼지갈비를 주문했다. 초량시장 쪽에 이름난 고깃집이 있다. 점심인데 고기를 얼만큼 주문해야 하나…. 부끄럽기도 하고 당최 감이 잡히질 않는다. 하지만 창피함은 기우였다. 들어서니 테이블마다 고깃덩어리가 수북히 접시에 얹혀있고 각각 불판 위는 전화에 휩싸인 듯 폴폴 연기가 나고 있다. 부산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선만 먹는 줄 알았는데, 도착부터 맹수의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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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고기는 맛났다. 핑크빛 선명한 삼단의 삼겹살은 진한 육즙을 품고 있다. 갈비는 오려붙인 ‘색종이 공작’같은게 아니라 뼈에 붙은 살을 이리저리 저며낸 진짜 돼지갈비로 고소한 맛을 낸다. 파김치도 맛있고 불판에 올려서 지져먹는 콩나물도 산뜻하다. 뿌듯한 마음에 기름 묻은 얼굴로 치간을 후비며 초량 거리로 나왔다. 살이 탱탱하고 진한 맛을 내는 영진어묵을 맛보고 시장을 돌아봤다.
초량. 이 역시 남다른 포스가 느껴지는 동네다. 지금의 부산이 형성되던 일제강점기, 바다를 메워 생겨난 땅이다. 초량 뒷편으로는 성냥곽같은 집들이 하늘까지 이어지는 산복도로가 있다. 아랫집 지붕이 윗집 마당이 되는 구조. 죄다 이층 아닌 이층집이다. 중간에는 큰 길이 나있어 다시 그 길로부터 달동네가 있고 내려오지만 결국엔 역시 달동네인 곳이 산복도로다. 부산에서 ‘산복도로’라고 하면 길이 아니라 언덕까지 치고올라가는 주택가를 말한다. 하늘로 오르는 길은 좁은 계단으로 이뤄져 있어 퍽 가파르지만 오를수록 부산항의 풍경이 조금씩 커져 즐거운 걷기 코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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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면 외국인거리. ‘쏘련’과 ‘중공’, ‘비휼빈’ 문화가 뒤섞여 낡은 도심 초량의 골목을 채우고 있다. 부산역에서 건너 초량역 쪽으로는 R자가 거꾸로 된 간판과 무슨 욕 비슷한 인삿말을 들을 수 있다. 반대편 중앙로 쪽으로는 해병대처럼 붉은 등과 금색 글씨가 가득한 상해 거리가 펼쳐진다. 최근에는 느닷없는 중국음식 바람이 초량까지 불어와 만두를 먹기 위해 모여든 이들이 긴 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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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피난을 왔는데 먹긴 집에서 보다 더 잘먹는다. 주먹밥 따위가 아니다. ‘최’와 ‘기’, ‘이’ 등 일행 몇몇은 광복동과 남포동 쪽으로 이동했다. 고기가 켜켜이 쌓인 위장 위쪽으로 주전부리를 얹기 위함이다.
피난 수도 시절부터 원조밀가루가 풍성했던 부산은 밀로 만든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국시(국수)도 참 많이 먹는다. ‘국시’하니까 쌍팔년도 유머 하나가 떠오른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맨든다. 밀가루는 봉지에 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옇는다. 봉지는 가게에서 팔고 봉다리는 점빵에서 판다. 가게에는 아주머니가 계시고 점빵에는 아지매가 계신다. 아주머니는 아기를 업고, 아지매는 얼라를 업는다. 아기는 누워 자고 얼라는 디비잔다. 하하하.
부산 밀가리 1탄. 할매집 회국수를 갔다. 그 골목은 유명한 국숫집으로 채워졌다. 오랜 냉면 명가인 원산면옥이며, 가야 밀면집도 이 골목에 있다. 회국수는 테이블 없이 디귿자 모양 바에 앉아 허겁지겁 먹는 집이다. 1951년 영도에서 창업했으니 역사는 무려 70년이 넘는다. 오로지 가오리 회를 올린 국수 하나로 부산 입맛을 사로잡은 집이다.
일찍이 이집에 와 본 적이 있다. 테이블 위에는 양념 그릇이 있는데 보기보다 굉장히 맵다. 짐짓 모른 척하고 국수에 양념을 마구 퍼넣은 다음 처음 와본 이들에게 권했다. 최, 기, 이는 쫄깃한 중면과 맵쌀한 양념 맛에 잠시 감탄하더니, 곧 만화 딱따구리에 나오는 서양 용처럼 입에 불을 뿜으며 돌아다닌다. 자세히 보니 안 온 동안 ‘순한 맛’ 양념통이 생겼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일행 중 ‘최’는 비빔당면을 고집했지만 우린 씨앗호떡을 택했다. 외국인들과 함께 줄을 섰다. 흥부의 박씨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름을 먹어 두툼해진 호떡 안에는 심으면 나무가 자라날 듯 싱싱한 싱아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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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국밥으로 유명한 부산에는 돼지우동이 있다. 고기를 잔뜩 썰어넣은 국밥육수에 우동을 말아낸 것이다. 연산동에서 파는 선지국수만큼 특이한 레시피지만 ‘밀가리’를 좋아한다면 도전해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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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힘들겠지만 밀면과 만두도 먹었다. 초량밀면에서 매콤달콤한 밀면에 만두까지 시켜먹고 곧장 도다리 회를 먹으러 갔다. 엥겔도 계산하다 화를 낼만한 음식소비였지만 비가 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래 여행지에 비가 오면 먹는 것 밖에 없다. 이번엔 일정이 복잡해 ‘밀가리 천국’ 부산에서도 유명한 구포국시를 먹지 못한 것이 한이라면 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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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날이 말끔히 갰다. 꽃바람 휘날리며 서면 롯데호텔 포장마차 촌에 피어난 벚꽃을 모두 떨어뜨려 버렸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영도에 갔다.
분명히 ‘부산 사람’이라 알고 있었는데 물어보면 ‘영도 사람’이라 답한다. 영도는 그런 곳이다. 다른 곳에서 수이 볼 수 없는 유별난 문화가 가득한 부산에서도 좀더 특별한 곳 영도. 영도는 원래 말을 키우던 국마장이었다. 영도에서 키운 말은 제 그림자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빠르다 해서 ‘절영마(絶影馬)’라 불렀다. 절영도가 영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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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시절 부산에 모여든 피난민들은 빈 공간을 찾아 영도로 몰려들었다. 그때 영도에도 산복도로가 생겼다. 굳세어라 금순아에 등장하는 ‘영도다리’를 건너 봉래산으로 올라가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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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해사고등학교 옆 청학동은 시원스레 펼쳐지는 부산항 전망이 일품이다. 용두산 공원 등 구 도심과 오륙도 등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청학 배수지 전망대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봉래산 정상까지 오를 수도 있다. 벚꽃이 산복도로를 화사하게 꾸미고 있다. 날이 맑아 더욱 푸른 바다가 지붕과 담장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것이 오르는 재미는 있지만 무척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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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 또 ‘밀가리’를 먹는 대신 돼지국밥을 챙겨먹고 흰여울 마을로 갔다. 오후 2시면 캉캉처럼 다리를 번쩍 드는 영도다리와 가까운 영선동. 이곳에 예쁜 이름만큼이나 멋진 흰여울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처럼 해안 절벽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사람 하나 씩만 드나들 수 있는 골목길이 토끼굴처럼 마을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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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을 만들어내는 한없이 파란 바다가 마을길에서 내려보인다. 예전엔 오갈데 없는 이들이 모여 비좁고 단촐한 집을 짓고 살았는데 다른 지역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만큼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됐고 최근엔 카페도 스튜디오도 많이 생겼다.
화장실도 끝내준다. 관광객을 위해 모퉁이에 설치했는데 창으로는 바다가 펼쳐진다. 아마 국내에서 가장 근사한 전망의 화장실이 아닐까 한다. 작은 창에 펼쳐진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에 소변을 보려다 좀더 머무르고 싶어 다른 일을 치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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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님아, 니 내 쫌 도와도” 얼마전 타계한 명배우 김영애 씨가 영화 ‘변호인’에서 열연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절 하루아침에 죄없는 자식을 차가운 감옥에 보낸 엄마는 이곳에서 펑펑 울며 변호인(고 노무현 대통령·송강호 분)에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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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편으로 자갈치시장과 송도해수욕장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인다. 끝자락 이송도 전망대에서 피아노 계단을 내려가면 절영해안산책로와 만난다. 내려가는 길, 마음이 바쁠 정도로 푸른 바다가 넘실댄다. 맏머리 계단, 꼬막집 계단, 무지개 계단 등도 수직으로 길과 집,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이 마을은 먼 풍경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햇볕에 내놓은 작은 화분이며 작은 나뭇가지에 돋아난 화사한 봄 꽃잎이 흰여울 마을을 채색하고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연분홍 벚꽃이 바닥에 깔려있다. 이렇게 화사한 봄을 맞은 적이 얼마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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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수놓은 꽃밭과는 또 다른 매력이 삶과 함께 펼쳐졌다. 평소 사는 곳과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여행의 즐거움. 스트레스를 피해 도망친 ‘피난수도’ 부산에서 마음껏 즐기고 돌아왔다.
demor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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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먹거리=남항 사거리 인근 영도 제기돼지국밥은 고기를 잔뜩 넣어 든든한 돼지국밥과 쫄깃한 우동 사리를 넣은 돼지우동으로 유명한 집이다. 부추를 곁들여 구수한 국물과 함께 허기를 채우기에 딱이다. 직접 만든 순대와 오소리 감투 등 모둠순대도 맛좋다. 영도구 절영로49번길 25. (051)418-0526
할매집 회국수(051)246-4741. 초량 시장 동림갈비는 질좋은 고기와 반찬, 된장 등 여러 상차림으로 인기를 모으는 집.(051)468-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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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부산롯데호텔(대표 김성한)은 동해선 광역전철 개통 100일을 기념, ‘부산 투어 패키지’를 5월 말까지 판다. 패키지에는 디럭스 타입 더블 또는 트윈 객실 1박, 42층 뷔페 라세느 조식 2인, 레일플러스 카드 1만원권 2매, 락앤락 텀블러 1개, 부전~일광 일대 관광 추천 지도 1개를 묶었다. 가격은 22만원부터. 패키지 이용객은 레일플러스 카드와 추천 지도를 들고 부전에서 출발해 동해선으로 37분 만에 일광까지 갈 수 있다. 기존 버스로 1시간 40분이 걸렸던 곳을 동해선 전철로 빠르고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다. 한편 부산롯데호텔은 금요일과 주말 무료로 ‘레일 데스크 수화물 배송 서비스’를 운영한다. 체크인 전에 부산역에 도착한 고객이 수하물을 부산역 안 레일데스크에 맡기면, 호텔 1층 컨시어지에서 픽업 할 수 있다. 체크아웃 이후반대로 컨시어지에 수하물을 맡기면 부산역에서 출발 전 찾을 수 있어 편리하다.
●시티패스=부산 전문 여행사 한세투어의 자회사 ㈜패스앤트립이 부산시티패스를 출시했다.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부터 유명 관광지 정보와 할인 입장권 및 다양한 체험, 제휴 가맹점 할인혜택 등을 카드 한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 특히 ‘원 데이 패스’는 가격 대 성능비가 좋다. 정상가 15만원이 넘는 다양한 시설과 체험 등을 만 24시간(첫 사용부터)동안 4만99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빅2, 빅3, 빅5 등 다양한 패키지 패스가 있어 본인의 취향에 맞춰 구입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