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이승록 기자] “우진이는요…”

인터뷰 도중 박정연의 눈은 종종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SBS 드라마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에서 그가 맡은 서우진 캐릭터를 떠올릴 때에는 꼭 그랬다. 극 중 주가람(윤계상)이 럭비부 문웅(김단)에게 “져도 돼”라는 말을 건네던 장면을 회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이 참 의아하면서 부럽더라고요.” 그 순간 어딘가를 응시하는 박정연의 눈망울에 비친 풍경은 한양체고 사격장이었다.

촬영을 마친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우진이었다. “우진이는 그게 외로운지도 몰랐어요. 금메달만 바라보고 살다가 럭비부 친구들을 보면서 많은 감정을 느꼈어요.”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박정연이 연기한 서우진은 ‘트라이’에서 성장을 상징했다. 전면에서는 럭비부가 극을 이끌었지만, 그 뒤에서 패배의 가치를 깨달은 인물은 서우진이었다.

“오디션 때부터 꼭 하고 싶었어요. 오래 기다린 끝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죠. 웅이와의 사격 대결에선 럭비부 친구들의 끈끈한 열정이 뜨겁게 느껴졌어요. ‘쟤네는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하고요. 그렇게 간절한 모습이 우진으로서는 혼란스러웠어요.“

금메달만 강요받던 서우진에게 패배는 금단(禁斷)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주가람과 럭비부가 그랬듯, 그곳을 지나간 사람만이 다다를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딛고 일어날 수 있는 힘, 스스로를 조금은 용서할 수 있는 관용. 인생에 예측불가의 시련이 찾아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의 마음까지. 모두 우리를 한 단계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좋은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생각하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저 역시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졌고요. 우진이가 비련의 인물처럼은 보이지 않길 바랐어요. 단단한 사람이기를요. 작가님이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는 우진이의 전사(前史)를 설명해주셨거든요. 외로웠을 우진이가 이해되더라고요. 저는 우진이만큼 여러 시련을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우진이가 돼서 우진이의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서우진이 패배와 마주하고 성장했듯, 박정연을 자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연기였다. 연습생 시절, 연기 수업에서 우연히 느낀 감정이 배우의 길로 박정연을 이끌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표현할 때의 희열.” 다만, 박정연이 캐릭터를 말하는 방식은 다른 배우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박정연은 서우진을 지나간 작품의 캐릭터처럼 말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서우진이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의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서우진의 눈으로 한양체고를 떠올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연기를 하면서 제 안에 이렇게 많은 부분이 있구나 알게 됐어요.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성격이 장점으로 바뀌기도 했어요.”

타인의 미세한 감정까지 섬세하게 느껴지는 성격. 반면 자신의 감정은 쉬이 드러내지 않는 신중한 태도. 그런 박정연에게 연기는 외부에서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는 것에 가까웠다. “어떤 캐릭터든 저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는 박정연의 말처럼 말이다.

따라서 차기작 KBS2 드라마 ‘화려한 날들’의 박영라도 결국은 박정연일 수밖에 없다. “영라는 엄마의 가스라이팅 속에 자라 자신이 억눌린 줄 모르는 인물”이라며 “자유를 얻었을 때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롭게 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눈빛은 박정연이기도 했고, 박영라이기도 했다.

앞으로 박정연은 배우의 길 위에서 또 얼마나 많은 자신과 마주하게 될까. 우리는 이곳에서 새롭게 태어날 박정연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저 박정연이라 적고, 서우진으로 읽는다. 내일은 아마도 박영라일 테니까.

“제 이름을 모르셔도 괜찮아요. 저를 우진이로 기억해주셔도 저는 좋아요.” roku@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