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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들불처럼 옮겨붙고 있는 학폭(학교 폭력) 문제로 체육계가 벼랑 끝에 몰렸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의 ‘쌍둥이 자매’ 이재영-이다영을 신호탄 삼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 체육계 학폭 문제는 한국 체육의 존재기반을 위협할 만한 중대 사건으로 떠올랐다. 프로배구에서 프로야구,그리고 지난주 FC 서울 기성용의 충격적인 성추행혐의 사건으로 비화된 프로축구까지…. 체육계 전체가 짐짓 쑥대밭이 됐다.
우후죽순 터지고 있는 체육계 학폭 사태에서 우선 정리하고 넘어 가야 할 게 있다. 개별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체육계 스스로가 폭력 등 반인권적 문화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기본전제다. 진보와 개혁은 철저한 자기객관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체육은 경기력에 매몰돼 체육의 중요한 가치에 애써 눈을 감아왔다. 체육은 사회와 철저히 유리된 채 그야말로 ‘외딴 섬’으로 존재했다. 그 섬에는 관행과 특수성이라는 ‘이란성 쌍생아’가 득세하며 시민사회의 기본덕목인 인권과 정의 등을 무시하고 짓눌렀던 게 사실이다.
이번 악재를 핑계나 변명으로 애써 부인하려는 태도는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육계도 겸허히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다만 체육개혁이 늘 그랬던 것처럼 ‘찻잔 속 태풍’으로 머물지 않기 위해선 혼을 담은 진단과 처방이 뒤따라야 한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체육계 학폭에서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는 명분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명분은 공감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체육계 학폭의 문제제기가 진위여부를 떠나 논란거리도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다른 분야게 견줘 ‘왜 훨씬 가혹한 비판을 감수해야 하느냐’는 체육계의 볼멘소리는 형평성이라는 잣대를 놓고 볼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은 외부에 있지 않다. 쏟아진 추문에 따른 체육의 추락은 오랫동안 개혁에 눈을 감아왔던 체육주체들의 업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터진 학폭 문제가 체육개혁의 마중물이 되도록 체육계는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 게다. 다만 학폭 사태를 완성도 높은 개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선 적어도 정교한 로드맵이 필요할 것 같아 몇 가지 제안을 드려본다.
우선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체육계의 학폭은 다른 분야와 사뭇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는 게 특징이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가 고정돼 있는 게 아니라 한 사건의 피해자가 다른 사건의 가해자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반복되는 게 체육계 학폭의 도드라진 특징 중 하나다. 체육계 학폭은 개인의 일탈이 빚어낸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일탈을 강제하고 있는 특정한 구조에 있다는 분석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스타플레이어를 표적삼는 지금의 학폭 폭로행태는 구조가 아닌 개인의 일탈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러한 접근은 짐짓 본질을 비껴갈 수 있어 위험하다. 스타플레이어만 겨냥해 불순한 의도로 자행되는 학폭의 폭로는 체육개혁이라는 명분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체육의 기반마저 송두리째 빼앗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육계 학폭을 개혁의 요긴한 불쏘시개로 활용하기 위해선 우선 아마추어와 프로를 통틀어 학폭 일제 신고 캠페인을 벌이자고 제안하고 싶다. 2~3개월 정도 신고기간을 정해 피해사실을 전수 조사하는 방식이다. 캠페인을 통해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훌훌 털어내고 원점에서 새출발하지 못하면 한국 체육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고해성사를 통한 새 출발, 학폭으로 혼란에 빠진 한국 체육의 가장 현명한 출구전략인 셈이다.
학폭이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면 처방도 여기에 집중해야 할 게다. 처벌보다는 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구조에 방점을 찍고 인권에 기여한 선수나 지도자 단체 등에 혜택과 가산점을 주는 메리트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도 구조개혁의 좋은 방안 중 하나다.
언론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구조가 빚어낸 사건에 대한 마녀사냥식 보도는 자칫 체육의 전체 생태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언론은 이번 사태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냉철한 머리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태도를 견지했으면 좋겠다. 과거보다 현실과 미래를 지향하고 개인보다는 구조에 천착(穿鑿)해 개혁의 실마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게 바로 학폭이라는 질긴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낼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편집국장 jhkoh@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