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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서울 1973년 3월 첫째주 표지. 당시 연예가를 주름잡던 최고 미녀들을 두고 표지모델을 뽑는 독자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편집자주>세월 50년이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천금 같은 시간이었을 수 있고, 한 사람의 생애일 수도 있는 긴 시간이다. 그 속에서 시대와 세상은 무섭도록 변해왔다. 상전벽해(桑田碧海),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을 실감한다. 1968년 창간된 ‘선데이 서울’은 한 시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연예, 풍속, 스포츠, 해외 화제, 인물 등에 목말랐던 독자들의 정보 욕구를 채워준 소중한 저널리즘이었다. 오랫동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선데이 서울’이 담아낸 꼭 50년 전의 시대와 세상 풍속도를 돌아보면서 그때 이야기를 반추해 보려 한다.

딱 50년 전인 1973년 3월4일 발행한 ‘선데이 서울’(229호)로 들어가 보자.

229호에는 어느 탤런트 부부의 이유 있는 별거 이야기, 죽음의 영화촬영 현장, 젊은 부부를 위한 새로운 피임의 지혜, 망원동 쓰레기장서 다이아몬드 반지 반짝 등 풍성한 연예가 화제는 물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기사는‘이색정보: 수출 한국의 희한한 수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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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의 오늘. 선데이서울 1973년 3월 첫 주. 스포츠서울DB

50년 전 ‘희한한 수출품’ 에는 “이런 걸 수출했다고?”싶은 신기한 목록들이 가득하다. 수출품 목록을 보자하면 독사, 달팽이, 화투, 벼루, 걸레, 번데기, 닥나무 껍질, 도복, 채소 씨앗, 장난감 말(馬) 등등 10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허접스러운 품목이랄 수 있지만 당시엔 당당한 수출품이었다. 그 시대, 우리나라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내다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으니 반도체를 수출하고 자동차를 내다 파는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품목일 수 있다.

‘이색적이고 희한한 수출품’ 몇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사람 목숨까지 위협하는 독사가 수출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독성이 강한 한국산 독사는 일본에서 강장제 드링크 첨가제로 인기가 높아 주문이 줄을 이었다. 태어난 고국(?)을 떠나는 독사 수출은 1972년 그해 11월까지 무려 7000㎏이나 되었고 57만 7000달러(약 7억5846만원)를 벌어들여 당시 우리나라 한약재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할 정도였다.

남자들 정력에 좋다는 속설로 독사는 예나 지금이나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수출 품목에까지 당당히 이름을 올리리라고는 그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사는 일본으로 팔려가고 달팽이는 달팽이 요리를 유난히 사랑하는 프랑스로 시집(?)을 갔다.

‘선데이 서울’에는 달팽이가 1973년 처음 프랑스 국민 식탁에 오르게 되어 외화를 벌어들이게 되었다고 자못 희망에 부푼 기사를 실었다. 달팽이는 프랑스에서 고급요리로 소문났으니 유럽의 미식 대열에 한국 식재료가 오른 셈이었다. 독사든 달팽이든 모두 목숨을 가진 미물이지만 그들도 나름 한국 경제부흥에 기여한 희생양이라 생각하면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고맙기까지 하다.

한국의 수출품
1970년대 한국의 수출품목.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사, 달팽이, 걸레.

1972년부터는 번데기도 수출되었다. 배고팠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간식으로 먹어오던 번데기가 물고기 먹이용으로 일본에 팔리기 시작했던 것. 번데기는 사료로 호평을 받았고 장기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이쯤에 이르면 번데기가 “나도 수출품”이라고 우리 앞에 주름을 잡을 만하지 않은가.

믿어지지 않는 품목이지만 걸레도 수출 대열에 동참했다. 1969년부터 낡은 옷이나 천으로 만든 걸레를 수출하기 시작해 1972년까지 약 3만 달러(약 4000만원) 어치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들 걸레는 주로 선박이나 공장 청소용 등으로 팔려나갔다.

부산에 있는 한 종묘연구농장에서 만든 개량 배추 씨앗을 재래종보다 훨씬 높은 가격인 1㎏당 10달러(약 1만3000원)를 받고 베트남으로 수출하게 되었다는 낭보도 전해졌다.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당시 수출 경쟁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수출권을 따냈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닥나무 껍질을 일본으로 수출해 1972년 한해 동안 44만 달러(약 5억7800만원)를 벌어들였다. 뽕나무과의 활목인 토종 닥나무는 한지의 원료로 인기가 좋아 생산이 주문을 따르지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처럼 나라도 국민도 가난했던 그 시대, 달러를 벌 수만 있다면 뭐든 내다 팔았다. 걸레, 독사, 닥나무, 번데기 등등 우수마발까지 수출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1964년 수출액 1억 달러(약 1315억원)를 시작으로 1977년 100억 달러(13조1500억원), 1981년 200억 달러(26조3000억원), 1988년 1000억 달러(131조5000억원), 2005년 5000억 달러(657조5000억원)를 달성하는 등 폭발적인 성장의 시대를 살아왔다.

수출 1억 달러를 최초로 달성했던 1964년 11월 30일은 ‘수출의 날’이 됐다. 1973년 번데기, 독사, 화투까지 수출해 32억 달러를 벌어들였는데 2023년 올해의 수출목표는 반도체, 자동차, 조선, 최신형 무기 등 총 6850억 달러(900조 7750억원), 물경 214배나 규모가 커졌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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