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김
2003 코리아패션월드에서 앙드레김(오른쪽)이 자신의 무대에 오른 세계적 모델 나오미 캠벨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고 있다.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앙드레김
2002 몽골리안 패션쇼에서 앙드레김(가운데)이 쇼가 끝난 뒤 박수 속에 입장하고 있다. 피날레 무대를 장식한 스타는 송승헌(왼쪽)과 성유리. 스포츠서울DB

백지훈 한지민
2006 삼성하우젠 k리그대상 시상식에서 펼쳐진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축구스타 백지훈(왼쪽)과 배우 한지민이 앙드레김 패션쇼 ‘시그니처 포즈’를 하고 있다. 배우근 기자 kenny@sportsseoul.com

편집자 註 : 50년 전인 1973년 3월, 당시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했던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스포츠서울] 3월이면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는 봄이다. 여심이 옷 단장을 하고 나들이에 나서는 계절, 그래서 봄을 ‘여인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보다.

1973년 3월 25일에 발매된 ‘선데이서울’ 232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인 앙드레 김의 봄 모드 작품을 화보로 선보였다. 파격 노출은 기본(?)이라 할 만큼 과감하게 몸을 드러내는 요즘 패션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고전적(?)이고 점잖은 50년 전 앙드레 김의 패션을 구경해 보자. 패션의 고전을 보는 기분으로.

앙드레김
1973년 선데이서울 지면에 소개된 앙드레김의 S/S 패션 화보. 스포츠서울DB

앙드레김
1973년 선데이서울 지면에 소개된 앙드레김의 S/S 패션 화보. 스포츠서울DB

앙드레김
1973년 선데이서울 지면에 소개된 앙드레김의 S/S 패션 화보. 스포츠서울DB

앙드레김
1973년 선데이서울 지면에 소개된 앙드레김의 S/S 패션 화보. 스포츠서울DB

앙드레 김은 세 여인의 패션을 봄이 오는 야외에 담으며 ‘아름다움’, ‘여성적 우아함’, ‘품위’를 환상적으로 표현했다고 전했다. 지금 보면 ‘그저 그렇다’는 정도로 수수해 보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대담하고 화려한 패션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이자 한국 패션을 상징하던 그는 ‘앙드레김 스타일’이라고 불리우는 패션을 반세기 동안 선보이며 수많은 스타들과 인연을 맺었고 사랑받았다. 온통 백색으로 꾸민 독특한 옷차림, 특유의 말투, 표정 등이 예사롭지 않았던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 패션계에 활기를 불어넣은 인물이었다.

유럽 왕실의 즉위식을 연상케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앙드레김 패션쇼는 항상 톱스타들이 엔딩 무대를 꾸며 화제를 모았고, 남녀가 이마를 지긋이 맞대는 일명 ‘이마키스’ 포즈는 그 자체가 시그니처가 됐다.

환상적인 분위기와 이미지를 연출했던 그가 1997년 IMF 국가부도 사태 이후 대우그룹, 한보건설, 신동아그룹 등 대기업들이 줄도산한 가운데 청문회에 출석한 적이 있다. 1999년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 이형자씨가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의 옷값을 대납했다는 이른바 ‘옷로비 사건’이 다뤄졌다.

앙드레김
1999년 ‘옷 로비 사건’ 증인으로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앙드레김(오른쪽)이 답변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무려 1380만원짜리 호피무늬 코트였는데, 문제의 옷을 만든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애먼 청문회에 불려나와 곤욕을 치렀다.

청문회 증인선서 과정에서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라는 본적이 밝혀졌고, 본명을 대라는 추궁에 김봉남이라는 다소 코믹한 본명이 알려졌다. 청문회장은 웃음바다가 됐고 그는 이후 예능프로그램에서 숱하게 패러디됐다. 결국 옷로비의 실체보다 앙드레김의 본명이 더 화제가 되면서 훗날 “결국 검찰 수사로 알아낸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 하나뿐이었다”라는 쓴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사실 본명보다 그의 이미지와 더 잘 어울렸던 예명 ‘앙드레 김’은 프랑스 외교관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빠르게 밀어닥친 국제화 시대를 내다본 혜안이 놀랍다.

고령에 이르러 대장암 합병증으로 고생한 앙드레김은 지난 2010년8월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수많은 스타들과 무대를 꾸몄던 고인의 빈소에는 김혜수, 이병헌, 전도연, 송승헌, 권상우, 최지우, 고현정 등 영화제 못지 않게 많은 톱스타들이 찾아와 고인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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