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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리 감독.사진|

[스포츠서울|칸(프랑스)=조현정기자]“관객을 사로잡는 독보적인 아우라를 지닌 배두나는 나의 굳건한 동지. ”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비평가 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다음 소희’의 정주리(42) 감독이 25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프레스 상영회에 이어 영화진흥위원회 부스에서 한국 취재진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인 ‘도희야’로 2014년 제6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데 이어 8년만의 신작 ‘다음 소희’로 2회 연속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두 작품 모두 배두나가 주연으로 열연했다.

‘다음 소희’는 특성화고 학생인 소희(김시은 분)가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면서 겪는 일과 이에 의문을 품는 형사 유진(배두나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16년 전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콜센터 현장 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영화 상영 후 관객들은 수분간의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해외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는 “칸의 숨은 보석:도덕적 분노가 스릴러 비극을 만났다”고 호평했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정주리 감독이 또다시 칸영화제 관객을 충격에 빠트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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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사진|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정 감독은 칸영화제에 두번 연속 초청된 소감으로 “촬영이 3월1일에 끝나 칸영화제 일정에 도저히 맞출 수 없을 걸로 생각했는데 도전해보기로 했다가 막상 폐막작으로 선정돼 너무 놀랐다”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을 존경하는데 ‘도희야’ 촬영 때 고레에다 감독님이 (영화 ‘공기인형’에서 함께한) 배두나씨를 응원하러 현장에 왔다. 올해 칸에서 고레에다 감독님의 작품과 함께 영화를 상영하게 돼 영광이고 기쁘다. 고레에다 감독님의 ‘브로커’에서도 배두나씨가 형사로 출연했는데 그 영화에선 수진, 우리 영화에선 유진 역을 맡아 재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배두나는 이번 칸 영화제에 ‘브로커’와 ‘다음 소희’까지 두 편의 출연작이 초청됐지만 넷플릭스 미국 작품 촬영 일정 때문에 칸에 오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배두나씨가 같이 없는 게 너무나 한스럽다”며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제목을 확정지을 때도, 영화를 찍는 내내 굳건한 동지라 생각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영화가 그대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너무나 연기도 잘했다. 우리 영화 촬영이 끝나고 부랴부랴 미국으로 촬영가면서도 ‘다음 소희’에 대해 궁금해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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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사진|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전반부는 여고생 소희가, 후반부는 형사 유진이 끌고 가는데 배두나는 소희가 겪은 비인간적인 고통을 수사하며 학교와 기업, 교육당국의 부당한 관행과 시스템을 하나씩 짚으며 숨진 소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무책임한 어른들의 태도에 분노하고 항변한다. 정 감독은 “주인공은 배두나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된 것도 배두나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 인물을 구현할지 상상하며 썼다. 영화 중반부터 나와서 끝까지 관객을 사로잡는 독보적인 아우라가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정 감독이 지난해 1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을 받아 제작이 본격화된 지난해 10월초 배두나에게 밤에 이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냈더니 배두나가 다음날 아침 직접 만나 “시나리오가 좋아 하겠다”고 하면서 촬영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음 소희’의 시작은 그가 지난해 초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현장실습을 콜센터로 나가 일하다가 목숨을 끊은 고등학생 이야기를 접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는 분노로 시작하게 됐다. “전부 취재한 사실이 바탕이 됐다. 사실적인 다큐멘터리보다 이야기 형식의 영화로 만든 건 고발하고 분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야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이는 게 아닌가 했다. 유진 같은 인물이 어딘가에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영화의 전반부를 이끌어가는 소희 역의 배우 김시은을 캐스팅하게 된 배경도 전했다. 정 감독은 “유진 역을 배두나씨가 하기로 하고 시작하자 마자 소희 역은 긴 오디션을 할 걸로 생각했는데 조감독님이 ‘이런 친구가 있는데 보실래요’ 하고 필름을 보여줬다. 한번 더 보고 싶어 찾아봤고, 미팅을 했는데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합시다’ 하게 됐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봤냐’ 니까 첫마디가 ‘이 이야기가 영화로 꼭 나왔으면 좋겠어요’. ‘소희가 세상에 꼭 나왔으면 좋겠어요’ 라는 희한한 말을 하더라. 소희가 와서 얘기하고 있는 거 같았다”고 회상했다.

소희라는 이름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손톱’에서 생계에 짓눌린 21살 동명 주인공에게서 따온 것이며 김훈 작가의 소방관을 다룬 에세이에서 “화재 현장의 불길과 화염에 고립된 소방관에게 동료가 다가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대목의 글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처지가 고립된 소방관 같다며 주위의 관심이 절실하다고도 했다.

이날 상영 후 눈물 흘리는 관객들이 상당 수 보인 것에 대해 “한국적인 상황 이야기고 문자 메시지 등을 다 번역할 수 없어 과연 외국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우는 관객들을 보며 너무 놀랐다. 어린 아이가 겪어가는 일들과 어떤 목표성이 있다면 그 힘듦이 자기네 입장에서도 이해됐나보다”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배두나씨와 언제든, 어떤 이야기든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또 형사가 될지 다른 인물이 될지는 모르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한편 ‘다음 소희’는 칸영화제 상영 후 개봉 준비과정을 거쳐 국내에서 관객들과 만나게 된다.

hjcho@sportsseoul.com

사진|트윈플러스파트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