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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LA=문상열전문기자] 개인적으로 KBO리그에서 가장 과소평가(Underrated) 받은 감독으로 2명을 꼽는다.
지난 21일 86세로 세상을 떠난 김영덕 감독과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을 이끈 김재박 감독이다. 특히 고인이 된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에서 역대 최다 6차례 준우승으로 이룬 업적에 비해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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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가 1982년에 출범한 뒤 두 팀을 우승으로 이끈 감독은 딱 2명이다. 김응용(해태,삼성)과 김영덕(OB,삼성)이다. 김영덕 감독이 빙그레 전성기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추가했다면 기념비적인 야구인으로 남았을 뻔했다. 하지만 역사는 김 감독을 외면했다.
알려진대로 김 감독은 재일동포 출신이다.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고인은 한국인 차별을 피해 1963년 말에 현해탄을 건너와 정착했다. 당시 일본의 선진야구를 몸으로 직접 터득한 터라 국내 실업야구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실업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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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감독으로서도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70년대 고교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새롭게 창단된 천안 북일고를 단숨에 강팀으로 이끌었다. 1977년부터 KBO가 출범하기 전 1981년까지 북일고 감독으로 재임했다.
OB 창단 감독이 된 고인은 우승 후보 MBC 청룡, 삼성 리이온즈를 제치고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일정이 짧은 레이스의 실업야구가 아닌 프로의 첫 장기레이스를 어떻게 운영할지 알았다. 박철순을 선발로 투입하지 않고 불펜으로 활용해 불멸의 22연승을 작성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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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3팀의 감독을 맡았다. OB, 삼성, 빙그레(현 한화)다. 3팀에서 12시즌 동안 707승480패20무로 승률 0.596을 남겼다, 1000경기 이상 지휘한 감독으로는 ‘최고 승률’이다. 정규시즌 승률 5할 이하는 1983년 OB 한시즌이 유일하다. 44승55패 승률 0.444였다.
700승 달성 때까지 100단위 승은 모두 김 감독이 KBO 최초 기록자다. 페넌트레이스 운영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국시리즈에는 통산 7차례 진출했지만, 시리즈 1승6패로 ‘큰 경기에 약하다’는 낙인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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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팀수가 작아 포스트시즌 성적으로 감독의 능력을 평가한다. 정규시즌 최고 성적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는 팀도 많고 162경기의 대장정이라 정규시즌 성적이 평가대상이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보스 콕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감독도 월드시리즈 승패는 1승4패다.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 등 마운드의 트로이카를 보유하고도 월드시리즈 우승은 한 차례에 불과했다.
고인이 KBO 최고 승률 감독에도 과소평가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도 빼놓을 수가 없다. 국내 스포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실력 이상으로 과대평가된 이의 공통점은 ‘미디어 프렌들리’다. 고인은 그러지 못했고 고인의 참모도 김 감독을 보호하지 못했다. 오해를 살 만한 언사들이 본인에게 직격탄으로 돌아온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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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김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 KBO와 한화 구단의 대응은 아쉬움 그 자체다. MLB를 흉내내려면 잘 좀 하기 바란다. MLB는 전직 메이저리거와 감독이 사망하면 커미셔너의 성명으로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구단도 즉각 애도 성명서를 발표한다.
김 감독의 기여도를 고려하면, 장례절차는 야구인장, 아니면 KBO장으로 치러도 될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KBO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가장 먼저 입회할 사령탑이기도 하다. KBO는 고인이 사망했다는 보도자료만 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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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는 2023시즌이 되면, 고인의 빙그레 시절 등번호(70)를 선수단 유니폼에 패치로 달아 추모하는 게 도리일거다. 고인은 KBO 역대 최강의 TNT 타선을 구성했다. 한화는 KS에 통산 5차례 진출했다. 이 가운데 4차례를 고인이 이뤘다. 누구도 김영덕 감독이 이룬 업적을 따라갈 수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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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sy1028@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