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정하은기자] “트로트 가수는 늘었는데, 파이는 그대로예요. 오히려 경쟁만 더 치열해졌죠.”
요즘 방송가를 보면 트로트를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한두 개가 아니다. 2019년부터 시작된 TV조선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을 통해 송가인, 임영웅 등 거물급 ‘트로트 스타’가 탄생하면서 트로트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용됐다. 유례 없는 ‘트로트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눈부신 트로트 시장의 성장 속에서 한 젊은 트로트 가수가 세상을 등졌다. 트로트 가수 해수(29·본명 김아라)가 지난 12일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현장에서 해수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를 발견, 극단적 선택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판소리를 전공한 재원으로 지난 2019년 11월 미니 1집 ‘내 인생 내가’로 데뷔했다. ‘장윤정의 수제자’로 불리며 예능에서도 얼굴을 알렸다.
스포츠서울 엔터TV·LG헬로비전 ‘장윤정의 도장 깨기’를 비롯해 KBS2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KBS2 ‘불후의 명곡’ 등에서 장윤정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며 밝은 모습을 보여왔던 터라 그 충격은 더욱 컸다.
해수의 비보를 접한 후 장윤정은 “너무나 사랑한 해수와 아픈 이별을 했다. 제 둥지 안에서 사랑받고 상처 치유하고 멋있게 날갯짓해서 날아가길 바라는 어미 새의 마음으로 품었는데 놓쳐 버렸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이렇게 아픈 이별을 하려고 그렇게 사랑스럽게 굴었나 보다”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치열한 트로트 시장에서 든든한 선배의 지원 속에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트로트 업계의 명과 암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트로트 하면 굶어죽진 않는다?’ 업계에선 ‘옛말’
지자체 행사가 주 수입원인 트로트 업계는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3년간 긴 보릿고개를 보냈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이 끝나고 각종 축제와 행사가 줄을 이으며 트로트 가수에 대한 수요도 부쩍 늘었다는 시선이 많아졌다.
최근 본지와 인터뷰한 트로트 가수 지원이는 “일주일에 4~5일 정도는 지방에서 행사 무대에 서고 있다. 코로나19 전에는 한 달에 70~80개의 스케줄을 뛰었다”고 말했다. 가수 홍진영도 최근 방송된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출연해 “전성기 때 하루 행사를 8개나 소화한 적이 있다”고 말해 놀라움을 안기기도 했다.
트로트 가수들이 오를 수 있는 무대가 늘어나면서 아이돌 그룹 활동을 하다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거나, 아예 10대 때부터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이들도 많아졌다. ‘트로트 하면 굶어 죽진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정작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말에 고개를 저었다.
트로트 신드롬은 일부 스타 가수에만 국한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행사는 늘었지만 무명 가수의 처우는 그대로라 상당수가 생활고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한 트로트 가수 매니지먼트 대표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트로트의 판도가 뒤바뀌었다. 트로트라는 장르가 더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건 부인할 수 없으나, ‘빈익빈 부익부’는 그대로다. 지자체 행사에서 소위 톱급이 2500만~3000만 원의 행사비를 받는다면, 그 외 무명 가수들은 100만~150만 원이다.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아무리 몸값이 비싸도 이찬원, 송가인 등 오디션으로 유명해진 트로트 가수를 부르면 버스를 대절해서 400~500명의 팬들을 동원할 수 있다. 지자체에서도 무명가수 여럿을 부르느니 톱급 한 명을 부르는게 남는 장사다. 오히려 가수들의 설자리는 더 없어졌다”고 푸념했다.
◇행사비가 수입 대부분 구조 “부업은 필수”
이미 톱스타 반열에 오른 트로트 가수들 역시 과거 무명시절 생활고를 겪은 일화가 드물지 않다. ‘걸어다니는 중소기업’ 장윤정 역시 무명시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소금물로 끓인 라면으로 사흘을 버텼다는 일화를 고백한 적 있다.
또 지난 2009년 ‘당신이 최고야’로 인기를 얻은 트로트 가수 이창용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며 트로트 가수의 생활고 문제가 다시금 부각되기도 했다. 향년 38세, 세상을 등지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트로트 판 자체는 커졌지만, 지자체 행사가 크게 늘어나지 않아 무대는 더욱 한정되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또 다른 유명 트로트 가수 관계자 측은 “유명 가수들의 몸값은 높아지는데 지명도가 없으면 100만 원도 받기 어렵다. ‘미스터트롯’ ‘불타는 트롯맨’ 등 오디션으로 스타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오히려 톱급이었던 가수들의 행사 수도 절반 가까이 줄었다. 파이 자체가 커진게 아니라 같은 파이를 나눠 먹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트로트 시장의 외화내빈이 계속되면서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들이 사업, 식당, 막노동까지 부업은 거의 필수적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한 트로트 제작사 관계자는 “트로트 가수는 아이돌처럼 앨범이나 굿즈 판매가 아닌 오로지 행사비로 먹고 살기 때문에 당장의 사무실 임대료, 차량 유지비, 의상비 등이 걱정이다. 지명도를 올리려 오디션에 나갔다가 떨어지면 앨범 제작비가 없어 가수 활동을 접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안타까운 경우가 참 많다”고 털어놨다.
트로트 업계에 정통한 한 대표는 “행사는 1년에 1만개가 넘지만 각 행사마다 무대에 서는 건 5팀 정도다. 많아야 10팀”이라며 “내년에도 트로트 오디션이 줄줄이 예정돼 있는데 실질적으로 돈을 못 벌고 투잡을 뛰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고 설명했다.
트로트의 붐을 계속해서 이어가려면 인재 발굴에만 힘쓸게 아니라 생활고를 걱정해야 하는 트로트 가수들의 수입을 보장하고 안정화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미스터트롯2’ 참가자들과 함께한 한 기자간담회에서 장윤정은 “빨리 가려면 선배들과 가고, 길게 가려면 후배와 가라고 하더라. 새로운 트로트 후배 발굴에 앞으로도 힘쓰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어디나 명과 암은 늘 공존한다. 트로트의 화려한 이면만 볼 것이 아니라 ‘풍요 속 빈곤’ 속에서 스러져 버린 혹은 스러지고 있는 수많은 트로트 가수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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