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인류는 혐오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 무력하게 서 있다. 해법은커녕 그 혐오가 이토록 깊어진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Adolescence)’은 이 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정서적으로 방치된 가정’에서 찾아낸다.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정해졌다. 13세 소년 제이미 밀러(오언 쿠퍼 분)다. 아버지 에디 밀러(스티브 그레이엄 분)는 아들이 살인하는 장면이 담긴 CCTV를 봤다.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했다.

제이미 밀러가 케이티를 살해한 배경은 ‘인셀’이라는 성적 모멸을 SNS에서 당했기 때문이다. 인셀은 비자발적 비혼이란 의미로, 제이미 밀러가 평생 이성을 못 만날 것이란 조롱이 담겨 있다. 그 폭력의 대가로 제이미 밀러는 수 십년 넘게 감옥에서 지내야 될 테다.

진짜 충격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제이미 밀러를 대하는 가족의 반응이다. 일반적인 드라마라면 가족은 아이가 왜 괴물이 됐는지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소년의 시간’의 가족은 다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보다 “우리 삶이 앞으로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더 두려워한다. 이사를 가는 것이 좋을지, 잃는 건 더 없을지에 집중한다.

이 가정은 겉보기에 평범한 우리네 가족과 닮았다. 아버지 에디 밀러는 다소 욱하는 성질이 있을 뿐 침착하고 가족을 아끼려 노력한다. 그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진짜 속 깊은 대화를 할 줄 모를 뿐이다. ‘정서적으로 무너진 상태’라는 것. 부모는 아이가 어떤 불안을 느끼고 사는지는 외면한 채 ‘좋은 부모’라는 사회적 이미지를 지키는 데만 몰두하며 살아오진 않았을까 의문을 남긴다. “우리 아이는 괜찮을 거야”라는 부모 세대의 위선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대목이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을 지키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붕괴’를 방치한 결과, 혐오로 인한 범죄가 나왔다.

무관심으로 자란 제이미 밀러는 분노를 해소할 방법을 온라인에서 찾았다. 뒤틀린 성욕을 SNS에 올렸고, 이에 대한 반발로 케이티가 그를 조롱했다. 그 억눌러진 분노와 소외감이 결국 살인 사건으로 터진 셈이다.

‘소년의 시간’은 혐오 범죄의 원인을 성별 간 싸움이 아닌, 소외된 인간의 좌절과 무관심의 구조에서 찾았다. 아이를 사려 깊게 돌보지 않은 가장 가까운 곳의 소외가 이 끔찍한 범죄를 낳은 것이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 큰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언제 가장 가까운 곳의 소외를 외면했는가?”

시리즈는 매우 자극적이고 첨예한 질문을 1시간 원테이크라는 예술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이 연출은 시청자에게 ‘관찰자’의 시점을 강요한다. 도무지 도망갈 틈을 주지 않는다. “어떤 구조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는가?”라는 질문을 냉철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우리에게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연출이다.

혐오의 대상이 된 케이티의 서사가 소년의 복잡한 내면에 비해 단순하게 소비됐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미칠 것 같은 불편함’은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을 차단하는 영리한 안전장치다. 가장 불편한 진실을 세련되게 직시한 용기로 시대상을 담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소년의 시간’ 속 부모의 방치가 혐오의 씨앗을 키웠듯, 우리 사회의 무관심은 혐오를 키우는 토양이 될 수 있다. 혐오 사건의 당사자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외면할 수 없는 숙제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