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 위태로움을 웃음으로 승화
인생길에 대한 성찰…진정한 ‘가치’에 대한 질문
박근형·김병철·이상윤·최민호·김가영·신혜옥 출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최근 대학로에 ‘보고 싶어도 내 자리만 없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가 성황리에 공연 중이다. 문화예술계에서 명성 높은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어, 이미 예상된 전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작품의 ‘피켓팅’ 흥행을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삶의 기다림 속에서 겪는 불안과 위태로움을 웃음으로 승화해 희망과 기대를 품게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패러디하고 오마주한 작품이다. 원작 속 무대 뒤를 배경으로 심각한 분위기와 철학적 질문을 희극적으로 풀어낸다. 때론 우스꽝스럽고 무거운 대화가 오가지만, 허무주의에서 실존주의로 점점 변하는 삶의 본질을 탐구한다.

◇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작품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는 언더스터디 ‘에스터’와 ‘밸’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언더스터디는 공연에서 주연 배우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무대에 설 수 없을 때 같은 배역을 대신 수행하도록 정해진 대체 배우들이다. 이들은 어제도, 오늘도 어둡고 지저분한 무대 아래 대기실에서 무대에 설 날만을 기다린다.
갑자기 조명이 떨어진다든지, 누군가 아프다든지 갑자기 누가 잘려야만 공연에 오를 기회가 생기는 언더스터디. 연극계의 오래된 전설 ‘맥베스의 저주’를 바라도 보지만, 이들이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약 없는 기다림, 공허한 약속. 어두컴컴한 대기실에서 탈출 시도도 한다. 하지만 떠날 수 없는 변명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붙이며 희망을 읊는다. “빌어먹을 이 세상의 이치”라면서도 끝까지 남는 자에게만 올 단 한 순간의 기회라며 자신을 다독인다.
이들에게 찾아온 건 기회가 아닌 불행뿐. 언제 무대에 오를지 모르는 ‘밸’의 단 하루를 위해 매일 공연을 보러 온 ‘메리 이모’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만 들린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장을 찾았던 그의 존재는 두 언더스터디 외엔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한 이는 단 한명뿐, ‘밸’만이 그를 기억한다. 어쩌면 ‘메리 이모’의 ‘고도’는 ‘밸’이었을지도 모른다.
뜻밖의 기회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 찾아온다. ‘에스터’의 심통으로 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관객 외 배우 출입 금지 구역인 공연장 1층 화장실을 간 ‘밸’이 그곳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장을 만나 전속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수십 년 동안 골방(대기실)에서 목 축이던 ‘에스터’는 부러움을 분노로 표출한다. 그리고는 ‘밸’에게 진정한 예술을 논하며 훈계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화를 냈지만, 이곳에 혼자 남을 생각에 외로움이 엄습했다.
축하는 못 해줄망정 목소리 높이는 ‘에스터’의 모습을 못마땅해한 ‘밸’은 감정에 북받쳐 지하 감옥(대기실)을 뛰쳐나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허름한 보금자리(대기실)로 돌아온다. 그가 평생 있어야 할 곳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그의 배우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 자아실현·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고도’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무엇인가. ‘에스터’가 애지중지하는 동상의 주인공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예술가인가. 인생을 화려함과 고단함이 공존하는 쇼(Show)처럼 즐기는 것인가. ‘햄릿’이 되고팠던 ‘타이터스’의 꿈인가.
돈보단 어려움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의 경지를 위한 외로운 싸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다. 당장 월세 걱정부터 해야 하는 현실에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하지만 언젠간 찾아올 찬란한 날에 대한 믿음은 더욱더 강해진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희망 고문이지만, 나쁘지 않다. 기분 좋은 상상이 웃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주니까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관객들에게도 ‘당신의 고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인생의 목표는 끝없이 이어지고, 이 항해를 함께 나아가는 이들이 누구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또 어느 순간 나와 같이 걸어갈 ‘그’ 사람도 기다린다.
그렇게 오늘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는 막을 내린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는 배우들은 내일을 기대하며 대기실 불을 끄고 마지막으로 공연장을 나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주인공들만의 예술적 세계관은 뚜렷하다. 존재감은 없지만 자존감은 지키는 ‘에스터’ 역 박근형과 김병철, ‘밸’ 역 이상윤과 최민호, ‘로라’ 역 김가영과 신혜옥이 지독한 인생에 희망 메시지를 전한다.
연기파 배우들인 만큼 각자만의 애드리브 연기·모션이 핵심 볼거리 중 하나다. 배역에 따라 연구하고 또 연구해 탄생한 가장 잘 맞는 옷을 입혔다. 무엇보다 이들이 걸어온 ‘배우 인생’이 연기에 녹아있다.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거쳤던 연습생·신인·무명 시절이 무대 위에서 바람처럼 스친다.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감정의 깊이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배우들의 진심이 느껴지는 소중한 내일의 극, 인생에서 ‘고도’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11월16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스테이지 3관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