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4시 10분.
KT선수단을 태운 버스가 잠실구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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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해 주세요”
비가 오락가락하는 쌀쌀한 날씨에도 선수들은 베테랑과 신인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사인요청에 성실히 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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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가장 마지막까지 사인을 해준 선수는 돌아온 메이저리거 황재균과 특급신인 강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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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의 사진 요청에도 미소를 지으며 ‘찰칵’
선수들이 야구팬들의 사인 요청을 무시한다는 최근 보도와 다른 모습이다. 혹시 관련 보도가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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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근에 타구단 선수들이 사인을 해주지 않아 생긴 문제는 잘 알고 있어요. 선수들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공지는 했죠. 하지만 KT는 신생구단이라 선수들이 원래부터 팬들에게 잘 했어요. 사인이나 사진요청에 다들 열심이죠. 구단에서도 매주 일요일마다 따로 이벤트를 만들어 팬들과 선수들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답니다”
-KT 관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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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선수는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몇몇 구단, 더 정확하게는 몰지각한 몇몇 선수들이 팬들의 사인요청에 무심한 반응을 보여 지탄을 받고 있다. 과연 선수들은 팬들의 소중함을 모를까?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선수들이 팬들의 사인 요청에 성실히 대응하지 못하는 건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시간이다.
원정팀 선수들은 4시 30분(주중경기 기준)에 시작하는 훈련에 맞춰 구단버스로 이동한다.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선수들은 분 단위로 이뤄지는 훈련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즉 출근길 여유가 없다는 것.
더구나 버스에서 내린 후, 선참급 선수가 사인 요청을 묵살하고 야구장으로 들어가면, 나머지 선수들은 따라 들어가 훈련 준비에 동참해야 한다. 즉, 눈치를 볼 수밖에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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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홈팀 선수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그들은 원정팀에 비해 출근 시간이 이르다. 또한 단체가 아닌 개인별 출근이다. 그래서 출입구 앞에서 삼삼오오 기다리는 팬들의 사인이나 사진요청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다.
경기가 끝난 뒤 상황도 마찬가지. 각자 퇴근하는 홈팀 선수와 달리 원정팀 선수들은 단체로 움직인다. 그들은 경기가 종료되면 가능한 빨리 구단버스에 타 숙소로 향한다. 숙소에서 샤워와 늦은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만약 그날의 MVP로 뽑힌 원정팀 선수의 경우, 인터뷰가 길어지면 안절부절이다.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이 신경쓰인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타야 한다. 그들이 팬들의 서운함을 몰라 사인을 안해주는게 아니다.
예외는 있다. 외국인 선수는 대개 버스를 타기 직전까지 사인요청을 받아주는 편이다. 국내선수와는 남다른 프로 의식을 갖추고 있다.
어쨌든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성공한 국내 선수들이 팬들을 외면하는 건, 프로 의식의 확실한 부재다. 그들은 매일같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평범한 선수들과 분명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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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구장의 구조도 문제다.
메이저리그 구장의 경우, 선수와 관중의 출입구가 다르다. 동선이 겹치지 않아 서로 빈정 상할 일이 없다. 대신 경기장내 그라운드에서 선수와 팬들의 대면이 이뤄진다. 훈련이 끝난 선수 중 일부가 경기 전에 그라운드로 나와 팬들에게 사인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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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구장은 관중의 시야 확보를 위해 외야쪽엔 안전그물이 없다. 그곳에서 선수와 팬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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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내구장은 불가능하다.
관중석과 그라운드가 안전 그물망으로 꽁꽁 막혀있다. 홈런성 타구가 넘어가는 펜스만 그물망이 없다. 결국 팬들은 사인을 받기 위해 경기장 출입구에서 선수들을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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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프로야구에서는 야구장 구조물을 바꾸지 않는 한, 해결 방법은 선수들에게 달려있다.
선수들은 가능한 팬들의 요청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영향력이 있는 선참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만약 훈련일정으로 여유가 부족하다면 조금더 일찍 야구장에 도착해 팬과 만나면 된다. 퇴근길에도 고사리 손에 쥐어진 야구공을 무시하지 않으면 된다.
LA에인절스의 마이크 트라웃은 이렇게 말했다. “사인하는데 5초면 되지만, 아이들에게는 평생 기억이 된다”라고.
배우근기자 kenny@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