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면도날로 머리를 밀었다. 이마에서 M자가 훤히 보인다. 군복을 입고 있다. 등장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 수 있다.
14일 개봉하는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보안사령관 전상두를 연기한 유재명은 새얼굴과 카리스마로 영화에 힘을 불어넣었다. 기존 드라마와 영화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욕망의 화신’으로 묘사한 것과 달리 전상두는 차갑고 냉철하다. 숨을 죽이고 있다. 욕망은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됐을 때 펼친다.
유재명은 “실존 인물을 연기하다보니 동력을 찾기 어려웠다. 거절했는데, 잔상이 계속 남았다. 다시 대본을 읽었다. 막연했지만, 새로운 인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행복의 나라’는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의 뒤편을 바라본다. 사건 가담자가 야만적인 재판을 통해 어떻게 목숨을 잃게 됐는지 초점을 맞췄다. 원칙을 목숨처럼 중시한 자와 무시하는 자의 대비를 통해 무엇이 의미있는 가치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전상두는 자기욕심을 위해 철저히 원칙을 무시한다.
“전상두는 욕망의 화신이지만, 매번 욕심을 표출하고 싶지 않았어요. 배우는 자기 역할이 더 강력하길 원하죠. 욕망을 절제하는 방향성을 잡았어요. 실존 인물은 악인이라고 낙인 찍혀있지만, 전상두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죠. 그게 차별화였어요. 우리 목숨을 담보로 나라를 지킨다는 자기 신념에 빠져서,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하려 했어요.”
작품을 위해 유재명은 이마를 깠다. 부담스러운 설정이지만, 작품을 우선하는 유재명은 거리낌이 없었다.
“예전에 연극에서 원효대사를 연기했기 때문에 M자 헤어스타일은 부담이 안 됐어요. 제 얼굴에 전 전 대통령이 비쳐야 하는 게 더 부담이었죠. ‘킹메이커’(2021) 땐 젊은 김영삼을 맡았는데, 약간 보이더라고요. 얼굴형이 달라서 비슷한 사람으로 느껴질지 궁금해요.”
이 영화에서 전상두는 박태주(故 이선균 분)와 마지막에 한 번 만난다. 승기를 잡은 전상두와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인 박태주의 대면은 분노를 쌓게 만든다. 술을 마시면서 자기 할 말을 간사하게 내뱉는 전상두의 얼굴이 잔상에 깊게 남는다. 유재명 역시 이선균과 마지막 연기라는 점에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추모는 그만하고 배우로서 기억했으면 해요. 영화를 보면 동물적이면서 섬세함이 돋보이는 배우라는 게 보이잖아요. 외로움과 불안함을 훌륭히 표현하고 굵은 선에서 서사를 끌고 가기도 하고요. 거침없이 자기 연기로 치고나가죠. 정말 대단한 배우예요. 사람을 먹먹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배우죠.”
요즘 한국 콘텐츠계가 어렵다고 하지만, 연기 잘하는 유재명에겐 소나기가 내리지 않는다. 영화 ‘소방관’과 ‘하얼빈’, ‘왕을 찾아서’가 남아있으며, 드라마 ‘수능 출제의 비밀’도 준비 돼 있다.
“한 편 한 편이 소중해요. 모든 작품이 재밌고 좋거든요. 작품 보는 기준은 없어요. 늘 주어진 작품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어요. 계획없이 살다보니 오히려 더 멋진 길을 걷게 됐죠.” intellybeast@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