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이혜영은 촬영 현장에서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배우가 가진 에너지를 오롯이 연기에 쏟기 위해 때론 거친 요구를 쏟아냈다. 가령 세팅이 다 끝난 세트도 “옮겨주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다시 뜯고 고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유는 있다. 연출적 관점에서 자신의 동선과 부합하지 않을 때 하는 이야기였다.
예외도 있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 ‘파과’는 달랐다. 이혜영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서 “여태 현장에서 바꿔 달라 하면 여태 감독들이 다 들어줬다. 심지어 ‘벽 뜯으세요, 카메라 저기로 옮기세요’라고 하면 저한테 다 맞춰줬다”며 “민규동 감독은 달랐다. 신마다 세부적인 계획이 있었고, 스태프 동선까지 다 꿰고 있었다. 다 찍고 나니 감독님이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싶었다”고 웃어 보였다.
‘파과’는 세상을 좀 먹는 인간들을 처리하는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 분)과 그를 쫓는 30대 킬러 투우(김성철 분)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힘이 뭘까 생각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킬러는 비현실적이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어요. 소설 원작에 액션이 많지 않은데, 액션을 한다니 불안하고 겁이 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대뜸 ‘액션 안 하셔도 돼요’라는 답이 돌아오는 거 있죠. ”
첫 촬영부터 산산이 부서졌다. 조각을 납치해 구덩이에 빠뜨리는 신이었다. 구더기가 온몸에 뿌려지고, 생매장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이혜영은 “이태원에서 2박3일 안에 촬영을 끝내야만 했다. 넘어졌는데 숨을 못 쉬겠더라. 갈비뼈가 부러졌다”며 “그 순간 ‘이거 몸 망가지고 영화 망치면 어떡하나’ 싶었다. 불안함과 고독감이 일시에 밀려왔다”고 지난 순간을 회상했다.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쓰니 촬영만 하면 정형외과에 가야 했다. 오기로 버텼더니, 차츰 나아졌다. 근사하게 스스로 킬러를 완성해 나갔다.

“폐건물에서 촬영할 때였어요. 조직원들이 나를 쳐다보는 걸 모르게 하려고 오리걸음 걷듯 포복해야 했어요. 리허설 때 그게 되더라고요. 제 스턴트도 못 했거든요. 물론 끝나고 또 병원에는 가야 했지만요.”
투우를 연기한 김성철과의 연기 호흡도 빛났다. 서로를 향한 경계 속에 사랑과 연민 사이를 오갔다. 이혜영은 “완성된 영화를 보니 조각과의 관계를 만드는 힘은 김성철에게서 나왔다. 그의 얼굴에선 청순함과 용감함이 동시에 나온다”며 “영화 속 조각이 섹스어필하게 느껴지는 건 오롯이 그의 연기 덕분”이라고 극찬했다.
이혜영은 마지막 액션 장면을 찍고 주저앉아 오열했다. ‘쓸모’라는 단어가 불현듯 지나갔다.
“우리가 ‘쓸모 있다’라는 말보다 ‘쓸모없다’(Useless)라는 말을 더 많이 쓰잖아요. 나는 이 영화 안에서 쓸모 있는 배우가 돼야 했거든요. 쓸모없는 취급을 받은 조각을 생각해 보니, 나는 얼마나 쓸모가 있었나 싶었죠.” socool@sportsseoul.com